[스크랩] 만고충신 성삼문

2008. 7. 24. 12:47[한자자료]/古典的 意味

 

나물채()자는 푸성귀()와 돋아나는 모양(/)의 날램과 세개의 싹(,.,)아래에 나무()가 벋티고있다 그러니까 푸성귀가 돋아나서 급기야는 나무로  변해버리는 온갖 나물의 생장과정을 묘사한 글자임을 얼른 알아낼수가 있다

기나긴 겨울을 보내고 그동안 저장해두었던 겨울 김치들을 모두 신물이 나도록 먹었으니 이제는 좀 새로운 봄의 미각을 온몸에서 갈망하는 계절이었는데 때마침 싱그러운 채소가 대지(大地=드넓은 땅)의 자양분(慈養分=어머니의 젖줄같은 자애로운 영양분)을 담뿍 먹음고 힘있게 솟아오르는 새싹으로 그 다양한 맛의 향연을 우리들이 만끽(滿喫=마음껏 배불리먹음)하고있는것의 봄의 전령이고 또 온몸에 활기를 새롭게 솓구쳐오르게 하는것이다

 나물채가 정말 보기에도 좋고 몸에도 좋지만 첫째로 입맛을 돋우어 나른하고도 춘곤증에 시들시들 해 들어갈듯 싶은 체질을 재활(再活=겨울잠에서 깨어나)의 역동성(力動性=솟구쳐  오르는 힘)으로 넘쳐흐러게 하는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나물()중에는 개강(芥薑=겨자와 생강)이 중()요하다는 첫글자를 익혀보게되는것이다.

나물채()자를보면 성삼문의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아무리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헤 났나니...

시조한수가 생각나는것이다.
쓰임새
*菜薇歌=은나라 때 백이와 숙제 두형제가 망국의 서름을 딛고 새로운 왕조에 반기를 들고 수양산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어 죽은 이야기를 노래한것


-  首 陽 薇  -
       (수양산 고사리)
當年叩馬敢言非그 때에 말고삐 당기며 감히 잘못을 말하니     

(당년고마감언비)
大義堂堂日月輝
 큰 의로움이 당당하여 해와 달처럼 빛났네

(대의당당일월휘)
草木亦霑周雨露
풀과 나무도 주나라 비와 이슬에 젖어 자란 것

(초목역점주우로)
愧君猶食首陽薇
 
그대가 수양산 고사리 먹은 것도 부끄럽구려

(괴군유식수양미)

 

성삼문의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입니다.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소개드린 시는 성삼문의 의기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을 이해하려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를 알아야 합니다. 많이들 들어보셨겠지만 간단히 설명을 드릴게요.

 

두 사람은 형제로 고죽국의 왕자였습니다. 아비가 동생인 숙제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했으나 아비가 죽은 후 숙제는 형인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였고, 백이 역시 아비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둘은 아예 달아나서 당시 인망이 높기로 소문이 자자하던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문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등극하여, 폭정을 일삼던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치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백이와 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서 신하가 왕을 치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했습니다(주나라는 은나라의 제후국이니 신하가 맞습니다). 무왕이 듣지 않고 폭군을 정벌하였고, 이들은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결국 굶주려 죽었다고 합니다.

폭정을 휘두르는 임금을 벌하는 것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일단 미루기로 하고요, 아무튼 백이와 숙제는 절개와 의로움의 상징으로 칭해져왔습니다.

 

이제 성삼문은 이들을 어떻게 읊었는지 보기로 하겠습니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에서는 이들의 의로움이 일월처럼 빛이 난다고 인정을 해주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목숨을 걸고 말린 행위가 바로 빛나고 당당한 대의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은 것은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수양산 고사리도 주나라 땅에 난 것이며, 주나라의 비와 이슬을 맞고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자신이라면 그것 캐먹으며 연명하느니 그냥 죽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될 듯합니다.

 

그러면 과연 성삼문은 이 작품에서 말한 것을 지켰을까요? 단종 복위 계획이 들통난 후 성삼문의 집에 가보니 그동안 녹봉으로 받은 곡식을 한톨도 쓰지 않고 모아놓았다고 합니다. 또 그가 올린 장계를 자세히 살펴보니 신하 신(臣)자를 쓸 자리에 모두 거(巨)자가 쓰여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문초를 받는 자리에서 인두로 지져대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세조를 '전하(殿下)'가 아니라 '나리'라고 부르며 임금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의연하고 꿋꿋하게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소신을 지킨다는 자세가 바로 이것이겠습니다.

 

성(成)-이루었다

삼(三)-세번째

문(問)-물었을때

출처 : 漢字 이야기
글쓴이 : 螢雪之功/형설지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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