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成三問의 臨絶詩

2008. 5. 28. 14:54[한자자료]/古典的 意味

다시 보는 成三問의 臨絶詩

 

成三問의 어머니가 성삼문을 낳으려고 産苦를 겪으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道士 가

大門을 열고 들어서더니 "이 집에 애기 낳았소?" 하고 묻더라지. 下人이 도사에게 "아직요." 하고 대답하니

도사 왈, "허허, 天下를 다스릴 人物이 되기는 틀렸는걸!" 하며 아쉬운 表情으로 돌아서 나갔다 한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찾아와서 역시 같은 질문을 하였다. 역시 하인이 "아직 안 낳으셨는뎁쇼." 하고 대답하니 "한 나라의 帝王이 되기도 틀렸군!" 하고 가더니 잠시 후, 세 번째 찾아와서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하인이 "네, 지금 막 낳으셨습니다요." 하고 대답을 했더니 도사는 "한 나라의 忠臣은 되겠군!" 하면서

사라졌다 한다. 이렇듯 도사가 찾아와 세 번 물었다하여 이름을 <三問>이라 지었다는 逸話가 전해지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성삼문을 이야기 할 때면, 그를 이개, 유성원, 하위지, 박팽년, 유응부와 함께

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목숨을 바쳐 임금을 섬긴 忠臣이라 일컫는다.

다음의 詩는 그가 刑場에서 處刑되기 직전 "죽음에 임하여 쓴 시," 곧 "臨絶詩"이다.

 

擊鼓催人命  (북을 두드리니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 것이요)

回頭日欲斜  (고개를 돌리니 해가 기울어지려 하고 있구나)

黃泉無一店  (황천 가는 길엔 주막집이 하나도 없다는데)

今夜宿誰家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잠을 잘꼬?)

 

사람을 處刑하기 위해 刑場으로 달려가는 수레는 死刑囚에게 용수(죄수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씌우는 원추형 모자)를 씌우고 북을 "둥둥둥" 울리면서 달려 나간다고 한다. 북을 울리는 뜻은 죄인이 처형된다는 신호이며

동시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들어있음이리라.

 

1행의 기귀(起句)에서 "북을 두드림은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 것이요."에서 우리는 성삼문이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錯覺을 일으키게 한다. 목숨이 頃刻에 달린 사람이 어찌 그토록

泰然自若할 수가 있을까?

 

2행의 승귀(承句)를 들여다보자. "고개를 돌려보니 해가 (서산에) 기울어질 욕심을 내고 있구나!"

하루의 해가 저물고 있는 黃昏의 광경을 描寫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瞬間을 맞고 있는

자신의 運命을 暗示하는  은유가 너무도 절묘하다.

 

전귀(轉句)와 결귀(結句)의 두 行에서 "黃泉가는 길엔 주막집이 하나도 없다는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잠을 잘꼬?" 이 대목은 성삼문이 가히 凡人의 삶을 超脫한 듯한 境地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죽는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진다고 믿었음인가? 다만, 황천으로 향하여 가는 도중에 주막집이 없어서

목을 축일 곳이 마땅치 않고 잠자리가 좀 불편한 것이 다소 신경이 쓰일 뿐이라는 毅然함을 읽을 수가 있다.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 길"인데 호들갑을 떨 필요가 무어냐는 듯한 성삼문다운 浩然之氣를 엿볼 수가 있다.

 

기회를 놓칠세라, 비자금(秘資金)이라는 편리한 이름으로 정권연장의 수단을 획책하거나

일확천금을 챙기려다가 逢變을 당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자주 보고 듣게 된다.

不忠이나 不義와는 일체의 타협을 拒否하고 꼿꼿하게 살다 간 그에게서

우리는 道士가 豫言한 것처럼 '忠臣의 典型'을 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