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고려 왕) [睿宗]

2008. 4. 25. 12:07[한자자료]/古典的 意味

 
1079(문종 33)~1122(예종 17).
고려 제16대 왕(1105~22 재위).
이름은 우(俁). 자는 세민(世民). 숙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유홍(柳洪)의 딸
명의태후(明懿太后)이다. 비는 이자겸(李資謙)의 딸이다.
1094년(선종 11) 검교사공주국(檢校司空柱國)에 이어 태위(太尉)가 되었으며,
1100년(숙종 5) 왕태자로 책봉되었다.
즉위초 여진정벌에 힘써, 그간의 패전의 원인을 보병이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게 했다.
1107년 12월 윤관(尹瓘)을 원수,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여진족을 소탕하고
갈라전(曷懶甸) 일대를 점령하여 9성(城)을 쌓도록 했다. 그러나 1109년 7월 계속되는
여진인들의 환부요구와 9성방비의 어려움 등으로 철수를 명했다.
당시 윤관의 별무반을 주축으로 하는 주전파가 여진과의 전쟁을 일단 승리로 이끌었으나,
대신(주화파)들의 책동이 주효하여 9성을 환부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왕권강화책으로 1109년
국학(國學)에 7재(七齋)를 설치했다. 숙종의 여진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를 간직하고 있던 예종은
장재(將材) 양성에 필요성을 느껴 무학재(武學齋)를 설치했다. 문(文)의 6재(六齋), 즉 여택(麗擇 : 周易)·대빙(待聘 : 尙書)·경덕(經德 : 毛詩)·구인(求仁 : 周禮)·복응(服膺 : 禮記)·양정(養正 : 春秋) 등에는
대학생 최민용(崔敏庸) 등 70명을 시취(試取)해서 각 재에 분거하게 하고, 무(武)의 강예재(講藝齋)에는 한자순(韓自純) 등 8명을 뽑아 교육을 받게 했다. 1116년에는 궁내에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설치해 도서수집과 경문(經文)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119년 국학에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두었으며, 학사(學舍)의 신축, 학관(學官)의 보강 등을 하고 7재의 정원을 유학 60명과
무학 17명으로 했다. 지방에도 삼경(三京)·팔목(八牧)에 통판(通判) 이상 및 지주사(知州事)·
현령(縣令)으로서 문과 출신자에게는 학사(學事)의 관구(管勾)를 겸직하게 했다.
한편 1115년 요나라가 완옌부(完顔部)의 여진족을 통일하여 세운 금나라를 협공하자고 요청했으나,
척준경(拓俊京)·김부식(金富軾)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를 거절했다. 1119년 금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동북변경의 장성을 증축했다. 1120년 팔관회(八關會)를 열어 김락(金樂)·신숭겸(申崇謙) 두 공신을 추도하여 〈도이장가 悼二將歌〉를 지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