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
황진이의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
황진이黃眞伊의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신이다. 중종 때의 사람이며 확실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나, 단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했다고 한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 뿐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하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정교하게 공작함)했다고 한다.
황진이는 학식과 권세를 겸비한 조선사대부들을 희롱하고자 조선 최고의 군자라고 불린 벽계수(본명 충남)를 유혹했다.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할 제 쉬어감이 어떠하리.
황진이의 격조 있는 구애시 앞에 벽계수는 군자로서의 허울을 벗어던졌다. 종친이라는 신분과 당대 최고의 호인인 벽계수를 무너뜨린 일로 황진이는 유명세를 탔다. 벽계수에 이어 불가의 생불로 통하던 지족선사를 파계시켰고 도학군자로 이름을 날리던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을 유혹하기도 했다. 황진이는 당시 도학군자로 이름을 날리던 화담이 진실한 군자인지 거짓 군자인지 밝혀보고자 했다. 모든 남성이 황진이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화담만큼은 그녀의 유혹을 뿌리쳤다. 화담의 높은 덕망 앞에 황진이는 감복하여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자신과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이라 칭송했다.
황진이는 사대부의 허울만 벗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여성은 아니었다. 선전관이었던 이사종을 사랑하여 6년간 전국을 유람했다. 한양 제일의 소리꾼이라는 이사종과 황진이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두 사람은 거칠 것 없이 송도를 떠나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한양과 송악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초월한 예술 동지이자 영혼의 동반자로 인생을 함께 나눴다. 연인과의 사랑을 바탕으로 시를 지을 때면 조선 최고의 시인이 되었다. 그녀가 이사종과의 열정적인 사랑을 읊은 <동짓날 기나긴 밤>은 오늘날까지도 애송된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구비구비 펴리라.
소세양蘇世讓(1486∼1562)과의 30일간의 사랑은 참으로 애틋하다. 황진이와 사랑을 나눈 소세양은 중종 4년에 등과하여 시문에 능했고, 벼슬이 대제학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소세양은 젊어서부터 여색을 밝혔다고 한다. 황진이가 절세미인이란 소문을 들은 소세양은 “황진이가 절색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녀와 30일만 함께 하고 깨끗하게 헤어질 것이다. 만약 하루라도 더 머물게 된다면 너희들이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황진이를 만난 소세양은 30일의 약속으로 동거에 들어갔다. 마침내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소세양은 황진이와 함께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황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시 한수를 소세양에게 써주었다. 그녀의 시 한수는 소세양의 마음을 움직였고, 친구들은 약속을 어긴 소세양을 인간이 아니라고 놀렸다 한다.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이것이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소세양과의 연정을 끝으로 황진이는 40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자신의 유언대로 개성 어느 길가에 묻혔다. 세월이 흘러 개성에서 그녀의 무덤을 발견한 평안감사 백호白湖 임제는 그녀의 부재를 슬퍼하며 시 한수를 읊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紅顔을 어데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느냐.
잔盞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많은 사람들이 황진이에 대한 글을 남겼다. 다음은 이덕형이 지은「송도기이松都奇異」다. 선조 37년 개성에 부임하게 된 이덕형이 진복이라는 서리의 아버지에게서 황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지은 것이다.
진이(진랑)는 송도의 이름난 창기娼妓이다. 진이의 어머니 현금은 꽤 얼굴이 아름다웠다. 18세 때 병부교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을 눈여겨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또한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에 와서 기둥에 기대서서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물을 청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으며 돌려주면서 “너도 시험 삼아 마셔보아라” 하였다. 마시고 보니 그것은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와 함께 좋아해서 드디어 진이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노래도 절창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선녀라고 불렀다. 개성유수 송공(송염 또는 송순이라고도 한다)이 처음 부임했을 때 마침 절일節日을 당하였다. 낭료郎僚들이 부아府衙에 조그만 잔치를 베풀었는데, 진랑이 와서 뵈었다. 그녀는 태도가 가냘프고 행동이 단아하였다. 송공은 풍류를 아는 사람으로 풍류장에서 늙은 사람이었다. 한 번 진이를 보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름을 헛되이 얻지 않은 것이로군!” 하고 기꺼이 관대하였다.
송공의 첩도 역시 관서關西의 명물이었다. 문틈으로 그녀를 엿보다가 말하기를 “과연 절색이로군! 나의 일이 낭패로다” 하고는 드디어 문을 박차고 크게 외치면서 머리를 풀고 발을 벗은 채 뛰쳐나온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여러 종들이 붙잡고 말렸으나 만류할 수가 없었으므로 송공은 놀라 일어나고 자리에 있던 손님들도 모두 물러갔다.
송공이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하는 여자를 모두 불러 모았으며, 이웃 고을의 수재守宰와 고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붉게 분칠한 여인이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떨기를 이루었다.
이때 진랑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왔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가 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된 잔치에서 손님들 중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송공은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것은 대개 그의 첩이 발안에서 엿보고 전과 같은 변을 벌일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술이 취하자 비로소 시비侍婢로 하여금 파라叵羅(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진랑에게 마시기를 권하고, 가까이 앉아서 혼자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진랑은 얼굴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데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간들간들 끊어지지를 않고,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며, 고음 저음이 다 맑고 고와서 보통 곡조와는 현저히 달랐다. 이때 송공이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기를 “천재로구나!” 하였다.
악공 엄수는 나이가 일흔인데 가야금이 온 나라 안에서 명수요, 또 음률도 잘 터득하였다. 처음 진랑을 보더니 탄식하기를 “선녀로구나!” 하였다. 노랫소리를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것은 동부洞府(신선이 사는 곳)의 여운餘韻이로다. 세상에 어찌 이런 곡조가 있으랴?” 하였다.
이때 조사詔使(중국에서 오던 사신)가 본부本府에 들어오자, 원근에 있는 사녀士女(선비와 부인)들과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모여들어 길옆에 숲처럼 서 있었다. 이때 한 우두머리 사신이 진랑을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을 급히 하여 달려와 관館에 이르러 통사通事(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천하절색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진랑이 비록 창류娼流이긴 했지만 성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관부官府의 주석酒席이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市井의 천예賤隸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자못 문자를 해득하여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화담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니, 화담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이 어찌 절대의 명기가 아니랴!
내가 갑진년에 본부의 어사로 갔을 적에는 병화兵火를 막 겪은 뒤라서 관청이 텅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사관을 남문南門 안에 사는 서리 진복의 집에 정했는데, 진복의 아비 또한 늙은 아전이었다. 진랑과는 가까운 일가가 되고 그때 나이가 80여 세였는데, 정신이 강건하여 매양 진랑의 일을 어제 일처럼 역력히 말하였다. 나는 묻기를 “진랑이 이술異術을 가져서 그랬던가?”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이술이란 건 알 수 없지만 방 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씩 없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여러 날 여기에서 머물렀으므로 늙은이에게 익히 그 전말을 들었다. 그 때문에 이같이 기록하여 기이한 이야기를 더 넓히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