陶 淵 明 (도연명)ㅡ四時(사계절)
四 時 (사계절)
ㅇ春(水)/幼 :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봄의 물은 사방의 연못에 가득차고
ㅡ평화,생명,축수(축복을 받고 태어나서 기대많았던 유년시절)
ㅇ夏(雲)/靑 :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여름의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가 많도다
ㅡ청운, 꿈,희망(꿈많고 학문 수련의 청소년시절)
ㅇ秋(月)/壯 :秋月揚明暉 추월양명휘
가을달은 밝게 빛나 떨치고
ㅡ화려한 시절/월계관(벼슬길에 화려했던 시절)
ㅇ冬(松)/老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겨울 고개위엔 소나무가 더욱 외롭구나.
ㅡ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빗겨서 지조를 더럽히지 않은 노년시절을 노래함
중국의 대표적 시인.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九江])
시상현(柴桑縣:지금의 싱쯔 현[星子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도연명이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259~334)은 동진 초에 장사군공(長沙郡公)·대사마(大司馬:최고군사령관)까지 승진했고, 할아버지 도무(陶茂)도 무창(武昌)의 태수(太守)로 재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막료장)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딸이었다. 도연명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의 첫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
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참모)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지금의
장링[江陵])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강주자사·참군 및 팽택(彭澤)
현령(縣令) 등의 관료생활은 고향에서 가까운 심양군 안에서 지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宋書〉 隱逸傳).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歸去來辭〉 序).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귀전원거오수 歸田園居五首〉이다.
이리하여 도연명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
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滿찰만;形聲. 물(氵)이 그릇에 가득(卄) 평평하게(兩) 찯다는 뜻. 부수 水
四넉사;指事. 원래 에울위(圍=口)는 원(圓) 또는 나라를 나타낸다. 네 방향을 나타내고 三에 一을 더하여 四가 됨. 부수 口(큰입구).
澤못.윤택할택;형성. 물水이 많은 곳을 찾아서擇 사니 윤택하다. 부수水
夏여름하;會意. 날씨가 더운 여름에는 머리와 발이 드러난다는 뜻. 부수夊 雲구름운;형성. 비雨에 이를云 겨울에 말을 하면 입김이 눈에 보이는데 비를 내리는것은 수증기라는 뜻. 부수는 雨
多많을다;회의. 많은 날들, 저녁夕이 계속 지나가니 많다. 부수는 夕
奇기이할기;형성. 크게大 옳다可고 하니 남 보다 더 뛰어나다 둘이 될 수가 없으니 기수奇數. 부수 大
峯산봉우리봉; 산山이 뭉쳐서 높게 모아 夆있으니 봉우리. 부수는 山
揚떨칠양;형성. 손手으로 해가 오르는 것 같이 올리거나 날린다는 뜻. 부수는 手
輝빛날휘;형성. 불을 피워서 군사들을 나타내 보인다 또는 이기고 돌아온 군대는 빛나 보인다는 뜻 부수 車
冬겨울동;회의. 마지막으로 뒤에夂 오는 얼음冫이 만들어지는 계절 겨울이라 부수는 冫
嶺고개령;형성. 산山이 거느리고領 이어주는 등성이라 부수 山
秀빼어날수;회의. 곡식 중에서 벼가 가장 긴요하고 열매가 많이 열리니 두들어진다는 뜻. 부수 禾
孤외로울고;형성. 子와 瓜 부수 子 松소나무송;형성. 木과 公 부수 木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
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