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혼자 가는 길도 허전하지 않으리라
無事猶成事 (무사유성사)
掩關白日眠 (엄관백일면)
幽禽知我獨 (유금지아독)
影影過窓前 (영영과창전)
사립문고리 걸어놓고 낮잠을 지네
깊은 산새가 나 홀로 고독한 줄 알고
그림자 아른거리며 창 앞을 지나가네
작가 최인호(崔仁浩)씨가 장장 3년간에 걸쳐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길 없는 길] 소설의
직접적인 집필동기가 되었던
경허(鏡虛) 선사의 "우음 3 (偶吟三)"이란 선시다.
4년여에 걸쳐 [잃어버린 왕국]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면서
동시에 이를 다큐멘터리화하는 KBS 텔레비젼 작업을 강행하다가
심신이 몹시 지쳐있던 최인호씨는 이를 마치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몇 년간 편하게 쉬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만난 경허의 우연한 노래(偶昑) 3의 첫 구절
"일 없음이 오히려 나의 할 일(無事猶成事)"에
작가는 벼락을 맞고 피뢰침이 되었다고 한다.
완전히 경허에게 사로잡힌 작가는
경허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며
다시 펜을 들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근대불교사에 경허(鏡虛)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불교는 참으로 허전하고 황량했을 것이다.
그만큼 경허의 비중이 큰 것이다.
작가 최인호는 그의 산문집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에서
[길없는 길]을 3년간 연재하며 스님에게 승복을 빌려입고
도심을 헤매고 다닐 정도로 스님이 되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인생이야말로 길 위에서 태어나고 길 위에서 사랑하고
길 위에서 죽어가는 하나의 길 없는 길"임을
절실히 느낀 그는 스님이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와 딸자식을 위해 살던 집을 버리고
삭발, 출가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
그런 최씨에게 원담 수덕사 방장스님이
"해인당 (海印堂)"이란 현판과 함께
경허선사의 선시 한구절을 써서 선물했다.
세여청산하자시 (世與靑山何者是)
춘광무처불개화 (春光無處不開花)
봄볕이 있는 곳에 꽃피지 않은 곳 없나니
한없이 깊어 검푸르면서도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에
뜻을 새긴다는 "해인(海印)"이라는 현판과
경허의 시를 집에 걸어두고 있으니
그의 욕계화택(欲界火宅)이 곳 절간이라는 것.
하여 최씨는 출가않고도 집에서 스님이 된 듯 살았다고 한다.